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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에서 만난 한 선임병의 이야기로 시작할까 한다.

 

 나와 거의 1년 짬밥 차이가 났던 C는 내가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 갓 상병을 단 분대 내 중간 서열의 고참이었다. 깡마른 몸에 까칠할 것 같은 인상, 처음부터 맞추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C는 소위 '풀린 군번'이었다. 밑에 후임병들이 많아 상병 4-5개월 차에서야 면제되는 청소를 상병 진급과 동시에 떼었다. C 위의 고참들도 그에게는 특별히 잔소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자연스럽게 군기반장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한편, 당시 우리 내무반에는 왕고(최고 선임)는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전통이 있었다. 내무실 막내는 왕고의 침구를 깔고 정리하는 일부터 각종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이 전통은 내가 왕고 되면 없어진다.”

 

 저녁 점호가 끝나고 왕고의 침상을 깔고 있는 내게 C가 옆에 다가와 나지막이 말했다.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서 그의 말을 농담이겠거니 그냥 흘려듣고 말았는데,

 

 그리고 8개월의 시간이 지나, C는 병장으로 진급했고, 맞선임과 5개월 차이가 났던지라 그 무렵 왕고의 자리에도 올랐다. 왕고가 된 날, 막내가 그의 침상을 깔려고 하자 C가 제지했다.

 

 “야, 내 침상 그냥 냅둬.”

 

 “아닙니다.” 막내는 C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다 짧게 대답하고는 이내 다시 C의 침구류를 정리했다.

 

 “그냥 두라고.”

 

 반복한 그의 말에는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그제야 막내도 “알겠습니다.” 하고 제 자리로 돌아왔다. 그렇게 C는 대대로 내려오던 악습 하나를 자기의 권한으로 없애버렸다. 그가 전역한 후 이어 왕고에 자리에 오른 고참들 중 이 제도를 부활시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군대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던 ‘상식’ 하나를 올바른 것으로 바꾼 것이다.

 

상식(常識) :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는 일반적인 지식, 이해력, 사리 분별 따위      

 

 상식은 변한다.

 불과 반 세기 전만 해도 학교에서 선생님께 맞아 팔이 부러져도 학부모들이 따지지 못했다고 한다. 교사는 사회의 지식인이었고, 학부모들은 선생님만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교사만큼 배운 요즘 학부모들은 오히려 학교에서 기세 등등하다. 자녀의 수가 줄고 아동 인권에 대한 의식이 성장하면서 이제 학교에서 마음 놓고 체벌하는 것은 더 이상 사회의 상식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버스 정류장에서 담배 피우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큰 반감이 없었다. 하지만 공중도덕과 모자보건, 그리고 ‘간접흡연 당하지 않을 권리’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이 발달하면서 ‘버스 정류장에서의 흡연’은 ‘비상식’인 행위로 강등되었다. 이처럼 하나의 상식은 사회 변화에 따른 사람들의 인식 진화에서 온다. 따라서 오늘의 상식이 내일의 비상식이 되기도 한다.

 

 영원불변히 당연한 것은 없다. 중세가 끝난 이래로 인류의 역사를 진보시킨 것은 “원래 세상은 그런 거야.”라는 운명론이 아니라, “왜 이것이 옳지?”라는 질문 때문이었다. 때로는 운명론자들의 저항으로 이보 전진 후 일보 후퇴하기도 했지만, ‘타인에게 억압받지 않는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 덕분에 비상식적인 상식이 축출되고 합리적인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 왔다. 아무도 왕고의 수발을 드는 것에 대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2000년대 초반 대한민국 병영에서 C는 “이게 왜 유지되어야 하지?”라는 올바른 질문을 던졌고, 그 상식을 바꿀 수 있는 자리에 올랐을 때 자신의 기득권을 과감히 포기하고 실행에 옮겼다. 난 지금도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막내에게 고개를 돌려 “그냥 두라고.”라고 시크하게 말하던 그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들의 문화는 군대와 유사하다. 비단 오너 CEO 뿐 아니라 임원이 되면 아래 직원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데, 이 상하 관계는 때론 회사 밖에까지 미치기도 한다. 임원의 자질구레한 사적인 심부를 뿐 아니라 경조사까지 아래 직원들이 동원되는 일은 8-90년대에 아주 흔했는데, 개인 차이는 있지만 나이 드신 임원들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물론, 90년대 초까지는 ‘OO 가족 모집'이라고 채용 공고를 낼 만큼 정년까지 함께 할 ‘평생직장’의 시대였기 때문에 회사 안팎의 구분 없이 모시는 문화가 ‘상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모시는 상사는 퇴직할 때까지 나를 끌어주실 분이니까. 하지만 이제 회사가 가족이 아닌 경쟁의 장이 되어버린 지금 예전과 같은 상사-부하 간의 유대감은 기대하기 힘들다. 더욱이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모토 아래 삶의 질이 강조되며 ‘연락받지 않을 권리’가 상식화 되는 시대에 어디 회사 밖 개인사 까지라뇨.

 

 최근, 어느 고위 임원 자제 결혼식에 와서 일손을 도우라는 지시를 받은 부장님 한 분이 고심 끝에 아래 팀원들에게 내리지 않고 본인이 직접 가서 허드레 일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C를 떠올렸다. 물론 이런 일이 ‘상식’이던 시대에 젊은 날을 보냈던 그 임원은 별 거리낌 없이 부탁하셨을 것이다. 아니면 그 부장님과의 사이에 상사-부하 이상의 끈끈한 유대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40대의 젊은 부장님은 임원의 사사를 돕는 일이 조만간 상식의 대열에서 이탈할 것이라고 판단하셨고, 결국 타협 안으로 후배들 대신 자신이 희생하는 방법을 택하셨던 것 같다. 즉, “야, 원래 사회생활은 이런 거야. 나와.”라는 말 대신 “이것이 대물림할 만큼 필요한 일인가?”라는 질문을 마음속으로 하셨던 것이다. 아마 이 부장님이 더 높은 자리에 오르시면 그때 그의 새로운 상식은 더 큰 힘을 발휘하겠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한 해에도 새로운 사람을 수십 명 만나고, 또 그에 맞먹는 수의 사람과 이별한다. 일을 정말 잘해서 좋은 성과를 낸 사람도 많지만, 사람이 떠나도 그 사람이 기억나는 건 그가 남긴 하나의 문화 때문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개인이 만들어낸 탁월한 성과는 회사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더 나은 성과로 덮이기 마련이지만, 좋은 리더가 만들어 낸 문화는 구성원들의 삶과 조직 생활에 영향을 미치며 오래도록 그 자리에 향기를 남기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자문해 본다. 나는 그런 위치에 올랐을 때 별다른 질문 없이 오래된 상식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C나 부장님이 했던 것처럼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새로운 상식을 열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인가. 나는 물론 후자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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