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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KBS 같은 채널 뉴스 아시아 (Channel News Asia)에서 작년 여름에 인턴을 하면서 생긴 일이다.

 

뉴스 인턴 자리를 노렸던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English Current Affairs 팀에 배치되었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프로덕션 팀인데 그 안에 프로그램별로 팀이 나뉘어 있다. 원래 온라인 비디오를 만드는 Transmedia팀에 갔어야 되는데 인턴이 너무 많다고 나는 "Days of Disaster"이라는 프로그램에 배치되었다. Days of Disaster (DoD)는 싱가포르에 지난 50년 동안 발생한 가장 최악의 자연재해, 그리고 사건 사고를 재 조명하는 다큐드라마다. 싱가포르 건국 50주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인만큼 예산도 제일 빵빵하고 제작 당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내가 있었던 2014년은 싱가포르 건국 49년 째) 

 

첫날, 아침 일찍 배정을 받고 DoD 팀이 앉아있는 위치로 행했다. 다행히 조연출인 '렝간'이 피디들에게 내 소개를 해준다고 했다. 막상 가보니 피곤에 쩔어보이는 30대 초반 남자 한명만 어깨를 푹 숙이고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렝간: 헤이 유밍, 너네 인턴이야. 한국에서 왔어. 인사해. 

유밍 (피디): oh, hey. 안녕, 나는 유밍이야. 음... 웰컴. 

나: oh, hi! I...

 

내 소개가 채 끝나기도 전에 유밍은 휙 돌아서 타이핑을 하기 시작했다. 뭔가 시작이 싸~했다. 그리고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인턴에게 쉴 새 없이 취재를 맡기고 자료조사를 시키는 다른 팀과는 다르게 우리 팀에서 나는 투명인간이었다. 

 


나: 아... 혹시 제가 뭐 할 거 있어요?

 

유밍 (피디): 아... 음... 없어.

제니스 (피디): 아! 점심 못 먹었는데! 나 토마토 두개, 양배추 세 개, 그리고 오뎅 세 개 (치즈 들어있는 것만!), 복쵸이 (bok choy) 다섯 개, 계란 두개로 해서 핫팟 (샤브샤브) 만들어다 줘!

톰 (피디): 어... 어? 아... 나 지금 나가는 길! 나중에 얘기하자!!!


 

맨날 일을 구걸하던 어느 날, 유밍이 웬일인지 나를 불렀다.

 

유밍: 너에게 매우 중요한 임무가 있어. 내일 촬영 때 나를 꼭 따라와

나: 넵! 

 

 

유밍과 나, 그리고 카메라맨 두 명이 향한 곳은 싱가포르 변두리에 위치한 한 공공 아파트였다 (HDB라고도 부르는데 싱가포르 주민 대다수가 정부 지원을 받는 공공 아파트에 산다). 집에 들어가보니 연세가 지긋하신 할아버지가 계셨다. 

 

유밍: 아, 이분은 Mr. Wong 이셔. 싱가포르에서 1960년도에 일어난 최악의 화재를 경험하신 분이야!

나: 아... 넵! 안녕하세요!

유밍: 네가 할 일은

 

 

(두둔 두둔)

 

 

유밍: 미스터 왕 얼굴이 카메라에 기름져 보이면  안 되니까 얼른 기름종이로 얼굴 닦아드리고 파우더 칠해.

 

나: 아.... 네...? 넵.

 

 

 

나는 내 개인 파우치를 꺼내서 (ㅠㅠ) 미스터 왕 얼굴의 기름을 기름종이로 꾹꾹 눌러낸 다음에 내 파우더로 (ㅠㅠ) 파우더 칠을 해드렸다. 

 

그 후로 본의아니게 지속된 나의 메이크업 서비스 덕분에 인턴이 끝날 때까지 몇 몇의 카메라맨들은 나를 한국에서 날아온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알았다....

 

 

 

그래도 외국 방송국에서 인턴을 해보겠다고 없는 돈을 탈탈 털어서 싱가포르로 날라오고 한국인 가정에서 입주과외까지 자처한 의지의 한국인! 인 나로서 방학 세 달을 분칠만 하면서 보낼 수 없었다. (참고로 싱가포르는 집값이 너무 비싸다. 월세가 살만 한 곳은 기본 80~100만 원 정도 한다. 그래서 영어 입주과외를 했는데 일주일에 12시간 수업하느라고 죽는 줄 알았다ㅠ)

 

다른 팀을 기웃기웃 거리면서 일감을 찾기 시작했다. 

 

"헤이 아밀리아! 아, 뭐라고? 한국어 번역? 오~케이. 그건 내가 전문이지" "아, 웨이핑. 그러니까 이 두 시간짜리 비디오를 다 스크립으로 받아 쓰라고? 당연히 되지~" "아, 라마단이니까 제가 한국인으로서 라마단 체험을 해보라고요? 네? 하루 종일 단식을 하고 물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아야 된다고요? 아, 그런데 촬영까지 병행하라고요? 아..... 네... 네! 당연히 되죠....." "아, 24시간 제보 핫라인을 제가 혼자 받으라고요? 아... 전화가 싱가포르랑 말레이시아 전역에서 오니까 새벽에도 받아야된다고요...? 아..... 아..네...네!"

다행히 나를 믿고 일을 주시는 피디님들이 늘어났고 자연스럽게 나는 일감에 눌려서 유밍과 예전처럼 자주 촬영 (메이크업 서비스)을 나가지 못했다. 

 

 

하루는 오랜만에 유밍이 나를 불렀다.

 

유밍: 내일은 정말 정말 중요한 인터뷰가 있어. 근데, 너 혹시 갈색 파우더 있니?

나: 아... 갈색? no...

유밍: 아, 그럼 하나 사와 내일 아침까지. 꼭!

나: 넵!

 

그 날도 일더미에 파묻였던 나는 시간 가는지도 모르고 리서치를 하고 있었다. 문득 시계를 보니 밤 8시, 아차 했다. 얼른 파우더 사러 가야 되는데.... 에이, 갈색 파우더니까 무스타파에 팔겠지. 거기 24시간 아니던가? (무스타파: 인도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엄청 큰 슈퍼마켓. 없는 게 없다는 소문이...) 

 

 

무스타파 (Mustafa)가 있는 리틀 인디아 (Little India)에 밤 9시 정도 도착하니 거리는 스산했다.

 

 

퇴근 일파는  사라진 지 오래고 담배를 피우는 인도 아저씨들만 곳곳에 서성거렸다. 빠른 발걸음으로 무스타파를 가보니....

 

이거 웬일... 왜 이러지... 나한테 왜 이러니....

 

 

그 날 무스타파는 닫혀있었다. 왜 그런지 아직까지 이유를 모른다. 시계를 보니 거의 10시가 다되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은 관광지를 가야겠다... 거기는 있을 거야...."

 

얼른 마리나 베이 (Marina Bay)로 향했다 (참고로 마리나 베이는 한국의 ssangyong이 지었다!!!!) 

 

 

 

마리나 베이를 갔더니 그 주변에 화장품  가계는커녕 모든 쇼핑몰들까지 문을 다 닫았었다. 관광지 맞음...?

멘붕을 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내가 다른 팀과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유밍이 심기가 불편해서 나랑 말도 잘 안 했기 때문에 유밍이 시킨 일만큼은 완벽하게 하고 싶었다.

 

 

급하게 주변에 있는 호화스러운 이름 모를 호텔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프런트 데스크에 가서 무작정....

 

 

나: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온 유명한 메이크업 아티스트입니다. 지금 제 클라이언트를 내일 만나야 하는데 제가 깜빡하고 갈색 파우더를 안 가지고 왔네요! 혹시 여기 인도나 말레이시아 분이 일하시고 있으면 제가 돈을 드리고 그분의 파우더를 살 수 있을까요?"

 

프런트 데스크 언니들이 웅성거렸다. 

 

언니 1: 어떡하죠? 지금 없는 것 같아요...

언니 2: 무스타파 가보셨어요? 

나: 네...ㅠㅠ

 

결국 난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거의 12시였고 7시 간 후에 촬영을 하러 출발해야 되는 상황. 방법이 없었다. 

 

 

혹시 쓸만한 게 없을까

 

내 파우치를 

열어보니.... 

열어보니.... 

열어보니....!

 

내 브론저 (bronzer)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요렇게 (밑에 그림 참고- 출처: 아주 뉴스) 생긴 브론저는 얼굴이 입체적이고 가늘게 보이도록 음영을 주는 화장품이다. 

 

 

 

"어, 색이.. 어둡네... 근데 완전 갈색은 아닌데... 거의 어두운 오렌지 수준인데... 될까... 백인이면 티 정말 날 텐데 내일...?"

 

방법이 없었다. 기도를 했다. "제발... 인터뷰이가 백인만 아니길....."

 

 

다음 날, 평소와는 다르게 유밍이 정장을 입고 왔다. 카메라 맨들도 조금씩은 신경을 쓴 눈치였다. 아, 치마 입고 오기를 다행이다,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제 갔던 마리나 베이와 가까운 엄청 큰 빌딩에 도착했다. 로펌과 금융 회사들이 잔뜩 입주한 빌딩이었다.

 

통유리인 미팅룸으로 안내원이 우리를 인도했다. 그리고 곧 풍채가 좋은 한 할아버지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익숙한 얼굴은 내 리서치에 자주 등장하셨던 싱가포르 전직 장관 Shunmugam Jayakumar이었다! 

 

그리고, 그는 인도인이었다 ㅎㅎ

 

 

촬영에 앞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채 파우치에서 내 브론저를 꺼내서 장관님 얼굴에 슥슥 분칠을 했다. 다행히 브론저의 누런 색은 장관님의 얼굴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동화되었다. 그리고 유밍은 뿌듯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한마디 했다. "아, 한국에서 온 제 인턴이에요. 메이크업을 도맡아하죠 저 대신, 허허."

 

촬영이 끝나고 유밍은 만족한 얼굴로 내 어깨를 툭 쳤다.

 

유밍: Thank you for the powder

나: (씩) You are we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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