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왔는데 날씨는 여전히 춥다. 오랜만에 아침 일찍 일어나 정신을 깨우고 택시를 타고 고용센터가 있는 공덕역까지 왔다. 첫 번째 집체교육보다는 교육장의 사람이 적다. 대부분 나처럼 구직활동이 귀찮은 사람들일 거라 예상했는데 대부분이 할아버지, 할머니이다. 교육내용은 나에겐 너무나 쉬운 워크넷(인터넷) 활용기이다. 구직을 위해 정부에서 주는 교육들이 다양하다는 것에 놀란 것보다 구직을 하는 연령대가 다양하다는 것에 더 놀란다. 신분증을 확인하고 신청서를 받기 위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데 앞문으로 꼬부랑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걸어 들어온다. 실업의 길에 접어들고 나서 새삼 세상을 다양하게 보게 된다.
고용센터의 공무원이 강의실 안에 앉은 우리에게 나눠준 출력물의 똑같은 칸에 써내려 가야 할 내용들을 여러 번 반복한다.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는 거라 생각하는 내용인데 몇 번을 반복한다. 한 귀로 듣고 대충 쓱 적어서 냈다. 무료하게 지나간 시간은 1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65세 이상의 실업자들은 오늘의 교육 한 번으로 수급요건이 채워진다. 가만히 셈을 해본다. 20대 후반에서 60대 후반까지 일해도 40년이다. 은퇴할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 나이가 멀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출력물과 수급요건이 되는 출력물들을 제출하는데 내 앞의 아주머니의 명함은 철판구이, 음식점이었다. 나이와 연령, 그리고 직업의 종류 따위는 상관없이 강의실에 앉은 우리 모두는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모였다. 직장이 없다는 것, 자의든 타의든 이제 나는 직업이 없는 백수라는 사실에는 인정하지만 언제든 원한다면 일할 수 있을 거라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아직은 내게 가득한가 보다. 이른 아침에 함께 모여있는 그곳에서 나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착각인지, 사실인지 중요치 않다. 모든 사람은 다 다르니까라고 넘겨버리면 그만일 수도. 그런데 그 이상의 오만함이 묻어나는 것 같아 씁쓸하다. 한 번도 실패하고 뒷줄에 서보지 않은 것처럼 함께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강의실에 있지만 나는 다르다는 무언가 선을 긋는 느낌. 나이 많은 선배들에게 한참을 꼰대라고 궁시렁거리다가 문득 내 꼰대질을 발견할 때처럼, 내 치부를 스스로에게 들켜버렸다.
공부 못하는 친구와 비교하며 자랑스러워할 나이였을 때도 있었다. 남들보다 더 잘하기 위해서라기보단 그저 잘하고 싶었던 거라 합리화하곤 하지만 결국 열등감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다. 어떤 취미를 가지더라도 장비를 갖추고 공부하며 더 많은 지식을 익히고 더 빨리, 더 멀리 가곤 했다. 항상 즐겁게 즐기자는 충고를 한다. 때론 듣기도 한다. 실제론 진짜 즐기기 위한 것 말고 누구보다 잘해야 행복한 사람이 된다. 그 많은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났더니 당연하게 나 스스로를 항상 남들보다 잘하는 특별한 사람으로 여긴다.
폐지를 줍는 할머니가 되는 상상을 한다. 대학까지 나오고 대기업에 십 년 넘게 다녔는데 폭삭 망해버려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바보가 돼버리면 어떡하나. 걱정의 끝에서 그 삶을 이미 '낙오자'라고 생각하는 나를 발견한다. 낙오자를 만드는 사회는 있어도 처음부터 낙오자는 없다고 생각하는 척하는 나를 반성한다. 특권의식이 별거겠는가. 사소한 선긋기, 너와 나는 달라, 동정으로 포장한 우월감이다.
진짜 못생긴 애한테 못생겼다 말 못 하고 진짜 뚱뚱한 애한테는 뚱뚱하다 말 못 하는 거야.
한창 나를 놀려대던 친구들에게 상처받았다 말도 못 하고 끙끙대다 어느 순간 깨달은 진리 같은 거랄까. 커가면서 누군가에겐 상처가 되는 말이 되는 상황을 판단할 줄 알게 되었다. 눈치가 생기기도 했지만. 약점을 약점이라 스스로 알고 있는 사람에게 말하면 상처가 된다. 남들이 약점이라 말해도 스스로 그게 나임을 인정하는 사람에겐 맘껏 놀려도 문제 될 게 없다. 예쁘다거나 똑똑하다거나 잘났다는 그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잘남과 못남을 선 가르기 시작하면서 남들보다 잘나기 위해 일생을 바친다. 남들보다 잘하는 것,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경쟁하고 우위에 서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그런 것을 높이 쳐주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살아간다. 강점도 약점도 내 사고 속에 존재하지 않으면 그냥 '나'로서 살아갈 수 있다.
지금 쉬고 있는 백수의 나에게 누군가가 너 일 안 하고 있다며 라고 툭 던지는 한마디가 거슬린다. 아마도 아직 나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짜 낙오자로 스스로를 만들고 있다보다. 강의실에 함께 앉아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도 우리 모두 쉬고 있는 같은 실업자이기보다 난 다르다는 우월감에 혼자 콧대를 세우고 있다.
진짜 낙오자나 패배자는 없다. 그들을 만들어 내는 나 같은 시선들이 사라지면.
진짜 우월한 이나 승자도 없다.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고 싶어 하는 나 같은 사람의 욕심이 사라지면.
오랜 시간을 참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다가도 이렇게 아직 완성되지 못한 덜 자란 나의 인격을 만날 때면 울고 싶다. 학교다닐 때 뭐 배웠나 한심하기도 하고,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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