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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을 선택하기 전 직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꿈이었다. 유치원 시절부터 줄기차게 불러냈던 노래 속에 꿈이 매번 바뀌었던 것처럼 꿈은 항상 넘실대며 날아다녔다. 그러다 고등학생 때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아파트 상가의 삭막한 모습을 보고 건축가를 꿈꿨다. 나의 전공은 그 시절의 꿈의 연장선상이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직업은 그 길을 이어가도록 해주었다.

 

직장인이었을 때 나를 소개하는 단어는 스스로를 부양할 수 있는 전문직 직장 여성이었다. 전문직이라는 말을 꼭 붙였다. 직업과 관련된 전공으로 보낸 5년의 시간, 그리고 대기업으로의 입사로 이어진 나의 직장 생활은 어쩌면 업계에서는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길일 것이다. 정규직으로 사원, 대리를 거쳐 실장에 이르기까지 비정규직, 프리랜서들을 만날 때마다 나의 편안한 길에 대한 안도감에 행복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들 중 많은 이들은 다른 회사의 정규직이 되어 아직도 전문가의 길을 가고 있고 나는 폐업을 선언했다.

 

오랜 시간 동안 꿈꿔왔고 가장 편안하고 안정적인 길에 접어들었던 나는 전문직으로서 경력을 쌓으면서도 항상 의문이 들었다. 나는 정말 이 일의 전문가일까? 만일 계속 직장에 다닌다면 나는 더욱더 전문가가 될까? 아니면 그저 직장인의 최고봉인 임원이 될까?  오랜 시간의 꿈이었기에 현실 속의 건축은 나에게 실망을 더 크게 안겼다.  회사에 대한 고민과 업에 대한 갈등은 한꺼번에 시작되었고 결국은 나에게 다른 길을 열어주었다.

 

오랜만에 절친과 한낮에 만났다. 백수가 된 이래로 가장 많이 말을 하게 된다. 구구절절한 시시콜콜 얘기까지도 끄집어내다 보니 전문직이라 자부했던 직장인의 불편한 진실을 포장하게 된다. 지금 당장 나에게만 관심이 가득한 나와는 달리 일찍 결혼해 아이가 있는 친구는 금세 나의 고민을 미래의 아이들의 고민으로 옮겨간다. 무심코 친구가 한마디 던진다.

누가 뭐래도 기술하나 만 가지면 살 수 있어. 딴 건 몰라도 기술 하나는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어.

친구 아이의 미래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어쩌면 태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나의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기 이전에 나는 지금 당장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묻고 싶다. 우리는 기술 가진 전문가를 키워내고 우대해주는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

 

처음 사원으로 일을 배울 때 가장 억울했던 것은 출력, 복사, 제본으로 이어지는 단순노동과 심부름에 불과한 업무들이었다. 그렇게 대물림되던 일들이 서서히 각자의 몫으로 나눠지기 시작한 건 불과 몇 년 전부터의 일이다.  회사의 분위기가 각자의 일을 각자 해결하는 것으로 변하기 시작하자 항상 막내가 마무리를 위해 선배를 기다리거나 일을 하달받기 위해 대기하는 관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잡일을 막내가 하는 관습도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가장 억울한 것은 차근차근 하나하나 밟고 올라온 선배들이다. 이제 내가 대장이 될 차례라고 생각했을 텐데, 예전엔 후배들이 다 해주던 것들도 각자 알아서 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선배들은 잊고 있었던 지난날의 기억들을 불러와야만 했다. 예전 같으면 애들이 다 해줬을 일들을 어렵사리 물어가며 해결해야 한다. 업계는 항상 진화한다. 일 년 전에 썼던 도구들도 낡은 것들이 되기 일쑤이고 당연히 협력업체를 붙였던 수많은 일들도 이제는 가벼운 프로그램으로 쓱 해낼 수 있게 되었다. 시대가 변화하던 와중에 오도카니 서 있던 선배들은 졸지에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으로 전락한다. 전문가 스스로가 바보가 되어간다.

 

변하지 않는 절대 불변의 진리, 연륜을 당할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연륜은 지혜이고 융통성이다. 수많은 경험들이 쌓여 어떤 상황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 그 연륜이 전문가에게는 가장 큰 자산이다. 후배들은 그 연륜을 배우기 위해 선배 대접을 해준다. 조금 더 일하는 법을 배우고 더 넓은 세상을 선배를 통해 알아가고 굳이 필요 없는 실수를 줄이게 된다. 다만 자꾸 변하는 환경 속에서 도구를 다루지 못하면,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지 못하면 연륜은 꼬장으로 변한다.

 

대부분의 직장은 직급제이다. 시간이 지나서 직급이 올라가면 더 큰 책임을 맡게 된다. 작은 일부터 조금씩 큰 물로 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르게 표현하면 자꾸만 일이 변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씩 차근차근 밟아나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자꾸만 진짜 현실의 일에서는 멀어지게 된다. 일의 시작부터 전 과정을 지켜보며 세세한 곳까지 신경 쓰기보다는 결정 그 자체에만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대부분의 대기업에서의 결정은 그런 식으로 일어난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반짝거리는 아이디어가 탄생해서 그저 그런 평범한 이야기로 변해간다. 직급제는 가장 날 것으로 살아남아야 할 것들을 가장 낡은 것으로 변하게 만든다. 실패를 두려워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높은 직급일수록 모험과 도전의 최선보다는 안정적인 차선을 선호한다. 그렇게 전문가들이라 자부하던 이들이 임원이 되고 또 다른 전문가들은 스스로의 기술을 임원이 되기 위해 기꺼이 버리게 된다.

 

 전문직으로 일을 시작해서 전문직으로 일을 끝낸다는 것은 고위직으로 은퇴하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일에서 전문직으로 끝까지 그 위치를 고수한다는 것은 직급제에서는 낙오자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두가 한 단계씩 직급을 올리면서 결정권자가 되기를 원하는 세상에서 기분 좋게 당당하게 항상 해오던 일을 계속해간다는 것이 가능할까. 실제로 내가 머물던 업계에서 직급이 올라갈수록 컴퓨터를 다루지 않았다. 그림도 그리지 않았다. 누군가가 열심히 작업해 놓은 것을 평가하고 또 평가한다. 여러 가지로 뜯어보고 몇 차례의 내부 보고를 거치고 나면 누구에게도 흠 잡이지 않을 그저 그런 결과물이 된다. 내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지도 않고 다른 이의 작업에 대해 마지막에 숟가락 하나 놓는 것에 불과한 구경꾼이 되는 것, 지금 우리의 직장에서 가장 원하는 편한 위치, 임원들이 하는 일이다.

 

언제부터 우리는 기술자, 노동자, 직접 하나부터 열까지 하는 사람들보다 가장 높은 곳에서 결정하고 판단하는 이들을 우러러보기 시작한 것일까.  왜 일하는 이보다 결정하는 이들이 우월하고 멋져 보이고 인정받는 것일까. 그럼에도 사회는 바보처럼 열심히 일하라고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있으려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라고, 기술을 가지라고 말한다. 기술만으로 외길을 걸어간다면 이룰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게 어떤 기술이든 꾸준히 하는 것만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을까.

 

새로운 길로 갈 수도 있고 또다시 가던 길로 갈 수도 있는 지금, 현실을 탓하기를 그만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자꾸만 넘어서지 못할 담들 이 눈에 보인다. 어디로 가도 자빠질 것만 같다.

 

회사를 다니며 편안해진 만큼 나약해진 것만은 틀림없다.

 

내 손으로 만든 것들이 인정받기 위해 다시 달려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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