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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과 살아내는 것. 뉘앙스의 차이가 생성해내는 틈은 생각보다 거대하게 벌어져있다.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버겁다. 그들에게 미래를 생각함은 사치다. 당장 오늘의 일과 내일의 피로함에 잠식당해 '나'와 '나의 꿈' 따위에는 도저히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 소위 단순노무와 허드렛일로 여겨지는 육체노동 기반의 직업들을 가진 사람들은 도약의 희망을 품기가 힘들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고통을 정량화하여 비교할 수 있을까.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겠지만, 굳이 고려해보자면 어느 쪽이 더 무겁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비등할 것 같다. 하지만 임금이나 처우를 저울질해보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이 사회를 물리적 외양적으로 가장 깨끗하고 합리적인 모습으로 유지 및 보수해주는 그분들의 노동력이 가치가 덜 한 것으로 절하되고,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그리도 고군분투하는, 소위 사회의 리더들이 일으키는 수많은 종류의 위선과 허례는 역설적이게도 정직하고 성실한 가치로 승격된다.

 

인간이 사유하며, 다른 짐승과 달리 의식 세계를 갖춘 지적 생물체라는 근거에 입각하여 정신노동의 가치를 최상위의 것으로 여긴다면, 정말로 그러하다면 이 논리는 문제가 많다. 물론,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정신노동의 영역으로 편입하고 싶어 한다. 중요한 사실은 사회의 구성원이 된 이상,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무한적으로 다양한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인데, 이로 인해 미소하게 삶의 방향이 틀어지면서 어떠한 변혁의 욕구만으로는 그 방향키를 돌리기가 쉽지 않은 결과에 봉착한다. 그분들의 삶은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그런 형태를 띠고 있거나 변화하더라도 그 시점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가 될지도 모른다. 비단 개인의 역량 부족은 아닐 것인데.

 

나는 사회주의자도, 공산주의자는 더더욱 아니지만 그들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종종 그려보기는 한다. 노동의 종류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동등한 임금을 받고 비슷한 수준의 소비 습관을 가지고 적당히 삶의 질을 윤택하게 유지하는. 그러나 이내 그것이 인간의 자유 의지와 욕망에 역행하는 것임을 자각하고는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간극을 효과적으로 좁힐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보지만 묘책이 떠오르진 않는다. 현재로서는,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한 성찰의 시간을 가지고, 최소한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도록 국가 차원에서 합의된 제도를 설치하는 것, 그것 말고는 뚜렷한 해결책이 없다고 느껴진다.

 

한 가지 아주 이상적이고 어찌 보면 터무니없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정신노동이든 육체노동이든 서로를 경계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한 명의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이기 이전에 개별적 존재로서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는 편협한 사고를 버리고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서로에게 한 번 더 표현해보는 것이다. 법과 제도가 인위적으로 ‘노동의 가치가 이러하니, 이렇게 조정하고 합의하여 분쟁을 최대한 줄입시다.’라고 조금은 부족한 해결책을 적용하기 이전에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지길 바라는 순진한 내 바람도 어느샌가 조금은 이뤄져 있을 것 같다. 일단은 나부터 이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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