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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옮기니까 진짜 좋아?”

지난 글에서 ‘왜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거야’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 정리한 내용을 구구절절 설명했다. 이렇게 설명하고 나면 '옮기니까 진짜 좋아?'라는 질문이 꼭 따라온다.

‘옮기니까 좋아’라고 질문하는 이유는 옮기고 나서 만족하고 있는지 궁금하거나, 대기업과 달리 스타트업은 어떤 게 다른지 궁금해서 물어볼 것이다. 가끔은 ‘가보니 별거 없잖아’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부류도 있다. 이 글의 제목을 읽고 찾아들어오는 독자들도 이것들이 궁금해서일 것이다. 그래서 구구절절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을 적어보았다.

다만, 조바심에 일러둔다. 대기업, 스타트업 모두 개인의 경험이기에 일반화하지는 말자. 재미 삼아 읽어내리기 바란다.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옮기고 아쉬운 점

아무리 각오하고 왔더라도 아쉬운 점이 없을 수는 없다. 아쉬운 점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예상했던 것과 예상하지 못했던 것. 물론 예상했던 것이라 하더라도 막상 현실이 되었을 때, 소위 현타가 세게 올 때도 있다.

우선 예상했던 것들.

첫째, 줄어든 각종 복리후생들.
책을 사는데 ‘아... 이제 포인트가 없지’
전자책으로 빨리 보고 싶은데 ‘아... 이제 전자도서관을 못 쓰네’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아... 이제 콘도 회원권이 없지’
점심메뉴 고민하다가 ‘아... 식당에서 포장해주던 샐러드 좋았는데’
차를 운전하다가 ‘이 차 참 싸게 샀는데, 이제 오래 타야겠군’
아들 병원 갔다가 ‘아... 이제 병원비 환급 안 되지’

복리후생의 부족함을 예상했지만,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일상생활 중에 저런 생각이 실제 들었으니까. 한 번씩 소소한 아쉬움이 찾아온다. 그래도 점점 적응이 된다.

둘째, 채용의 어려움.
대기업 채용팀장을 했었다. 공채를 하면 2만 명에서 3만 명 정도 지원을 했다. 걸러내는 게 일이었다. ‘유튜브 회사설명회’를 열었는데 동시 접속자가 500명 정도 밖에 안 들어왔다고 속상해 했다. 회사 규모 상 몇 천명 정도는 들어올 줄 알았으니까.

지금은 다르다. 채용 광고를 해도 큰 효과가 없는 것을 경험한다. 합격을 시켜도 처우 조율 과정에서 이탈이 많다. 예상한 일이지만 한 번씩 힘 빠지는 건 사실이다.

셋째, 일이 많음.
대기업은 사람이 많아 직무 전문성을 키워나가면서 성장한다. 나 또한 인사업무를 오래 했지만 몇 가지 Job 위주로 경험했다. 인사에서도 경험조차 해보지 않은 업무가 많고, 총무는 R&R 정도는 알지만 실무적으로 해본 건 아니었다.

지금은 인사총무의 모든 것들을 해야하는 팀장이자 실무 역할까지 커버해야 한다. 대기업 팀장 생활 몇년 동안 실무가 아닌 업무 지시를 주로 했다. 요새는 출근하면 먼저 실무자처럼 업무를 정리하고, 잠시 팀장으로서 의사 결정하고 스스로에게 셀프 지시한 뒤, 다시 팀원으로 돌아가 수행하는 1인 역할극을 하고 있다.

넷째,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가진 고질적인 문제들.
“형, 스타트업에는 세 가지가 없어요. 첫째는 프로세스와 체계, 둘째는 상식, 대기업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발생할 거예요, 셋째는 고용안정성, 형도 포함이에요. 기대하면 안 돼요.”

스타트업에 입사하기 전, 조언을 구하기 위해 먼저 스타트업으로 간 후배를 만났다. 그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진심을 다해서 해준 조언이었다. 우리 회사도 거의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여기까지는 각오했던 것들이라 그나마 현타가 덜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다.

첫 번째는 대출이었다.
대기업에 있을 때는 대출한도가 꽤 컸다. 투자 공부도 했던 터라 당장 쓰지 않더라도 레버리지 확보 차원에서 마이너스통장을 최대한도로 받아두었다.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 때 은행 직원이 ‘자기가 받을 수 있는 이율보다도 낮아요’라며 부러워했다. 스타트업으로 옮기고, 딱 반년 정도가 되었을 때 대출이 만기 되었다.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예상보다 한도는 많이 적었고, 이율은 많이 높았다. ‘이게 최대한도냐’라는 질문에 ‘그 정도도 감지덕지예요’라고 대답하는 것처럼 들렸다.

만약 대출을 실행해서 사용하고 있었다면 한도 조정으로 인해서 상환 압박이 컸을 것이다. 요새처럼 대출이 힘든 시기에 난감한 문제가 발생할 뻔했다.

두 번째는 부끄러운 이야기인데 돌아가신 아버지께 끝까지 이직을 말씀드리지 못했다.
아버지는 작년에 췌장암 선고를 받고 항암치료 중이었는데, 입원 중에 간호사에게도 ‘우리 아들 현대 인사팀장이에요’하고 자랑스러워하셨다. 아프신 아버지께, 네이버와 카카오도 잘 모르시는 연로한 아버지께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가족들도 그냥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 아들의 이직을 모른 체 돌아가신 게 죄송하지는 않은데, 속상한 마음이 남아있다.



이제부터는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 스타트업에 오고 나서 좋은 점이다.

스타트업의 좋은 점

우선 대부분의 스타트업에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사항들이다.

첫째, 좋은 서비스이자 자기가 좋아하는 서비스를 만든다.
우리 회사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는 ‘누구나 일상 속에서 차별 없이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고 있다. 병원에 가는 것보다 편안한 방법으로 일상에서 당뇨병을, 아토피를, 재활훈련을 손쉽게 관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아직은 사용자가 아주 많거나 트렌디한 서비스는 아니지만, 소중한 서비스를 만든다는 만족감이 있다. 그리고 그런 가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경영진과 이를 믿어주는 구성원이 있다.

스타트업마다 그들의 서비스에 따라 조직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트렌디한 서비스를 만드는 조직은 직원들 또한 팬시하고 개성이 강하고, 하이테크 서비스를 만드는 조직은 개발 중심 문화가 강한 편이다. 우리는 건강을 위한 서비스를 만드는 조직이라 그런지 ‘차분하고 선한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서비스를 만들면서 회사와 함께 성장하는 일종의 동질감을 느낀다. 대기업에서 느끼는 회사와의 거리감과는 훨씬 가깝다.

둘째, 해야 할 일만 해서 좋다.
안타깝게도 대기업에서는 구성원들이 왜 하는지 모르는, 목적을 상실한 일이 많다. ‘이거 도대체 왜 하는 거야?’ 같은 푸념에 대답은 주로 ①’몰라’ ②’위에서 궁금하대’ ③’위에서 잘 모르시잖아’이다. 누군가의 막연한 궁금증에 한 팀이 움직이고 있거나, 잘못된 지시인 줄 알면서도 아무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보고서를 쓰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대기업에 계신 분께 ‘절반 정도는 그런 일이잖아요’ 했더니, 그분은 오히려 ‘70%는 될 것 같은데’라고 했다. 대기업은 어느 회사나 비슷한가 보다.

스타트업에서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일을 할 시간이 없다. 해야 하는 데 여건 상 못하고 있는 일들이 워낙 많아서, 쓸데없는 일을 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을 최우선으로 한다.

그리고 자기의 역할을 넘어서 주도적으로 더 많은 역할을 해보고 싶은 사람을 환영한다. '3년 후에 사업을 하고 싶다'고 하면 대기업에서는 탈락이지만 스타트업에서는 그런 태도를 환영한다. 웬만한 대표들도 다 좋아한다. (적어도 3년은 버티겠구나...ㅎㅎ)

셋째, 피드백이 빠르다.
큰 기업은 제도를 만들더라도 사람도, 제약도 많아서 피드백이 늦거나, 있더라도 확인하기 힘들다. 스타트업은 빠르다.
위에서 '스타트업의 아쉬운 점'을 열거할 때, ‘혼자서 실무자 역할도 하고 리더 역할도 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돌려 말하면 혼자 결정하고 실행하기에 정말 빠르다는 것이다. 설사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바로 수긍하고 조치하면 된다. 구성원도 서로의 상황을 알기에 실수를 이해하고 넘어가 준다.

위 세가지 외에도 수평적인 문화, 자유로운 분위기, 스톡옵션과 같은 경제적인 보상 등도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스타트업의 좋은 점이다.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을 적고 보니 좋은 점은 대체로 ‘일과 동료, 분위기’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반면 아쉬운 점은 대체로 ‘처우, 네임밸류, 프로세스’ 등과 같은 것들이다.

즉 일과 관련된 본질적인 것은 좋지만, 부수적인 것들은 부족하다.


스타트업으로 옮긴 후 좋은 점 한 가지가 더 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은 점이다.


나의 특수한 상황일 수도 있겠지만 ‘대기업’ ‘인사’ ‘팀장’이라는 특성상,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형성되는 스테레오 타입이 있다. 복장, SNS, 언행 등 누가 강요하지는 않지만 자기 검열이 있었다. 점점 회사, 집, SNS, 친구에서의 ‘내’가 각기 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누구나 그렇듯 회사 사람들에게 SNS를 오픈하지 않았고, 서로 다른 SNS에 서로 다른 메시지를 남겼다.

멀티 페르소나이지만 점점 불편해져 갔다.

스타트업에서 새롭게 시작하면서 하나의 나, ‘싱글 아이덴티티’가 되자고 다짐했다. 내 이름으로 페이스북과 브런치를 하고 회사 이름까지 오픈했다. SNS에서 하는 이야기를 회사에서 똑같이 하려고 노력한다.

사십춘기에 더 이상 정체성 분리되지 않고, 점점 하나의 내가 되어가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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