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외국인 노동자가 되었나

By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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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나는 그저 그런 스펙을 쌓은 뒤, 지방의 어느 대학을 졸업했다. 몇 개월간의 대기업 인턴과 얼마간의 백수 생활을 거쳐 외국계 기업에 취직했다. 외국계라고는 해도 한국에 진출한 기업들이 으레 그렇듯 철저히 한국화 되어버린 회사였다. 그곳에서 1년반쯤 일하다 싱가포르로 넘어갔다.

 

내가 졸업할 무렵 이른바 필수 스펙은 학점, 토익 점수, 공모전, 대외활동, 어학연수 등이었다. 1학년 2학기 때 연애에 좀 미쳤던 탓에 학점은 깔끔하고도 깔끔한 2.00. 여전히 그 연애는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그 학점을 메우느라 졸업할 때까지 재수강과 함께 살았다. 

 

나는 취직할 때까지 여권이 없었다. 어학연수는커녕 일본에 1박 2일도 다녀온 적이 없다는 뜻이다. 지방대 인문대생을 공모전 스터디에 넣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공모전을 주최하는 회사나, 그들이 다루는 주제는 살면서 내가 한 번도 관심을 가진 적이 없는 것들뿐이었다. 참신한 아이디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몸으로 때울 수 있던 대외활동과 스터디, 그저 그런 토익 점수, 평점 4.0점을 거의 따라잡은 학점이 다였다. 어디 명함도 못 내밀 초라한 스펙의 소유자가 나였다. 

그런 내게 외국계 기업 취직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일일지 몰랐다. 월마다 하는 결산, 거래처 사람과 매일 하는 통화, 본사 및 해외 고객과 영어로 주고받는 이메일, 가끔 나가는 외근, 달마다 받는 월급. 이 모든 것이 드디어 내가 밥값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새로운 회사에서 정신없이 적응하며 일을 배우고, 한두 번 화장실에서 눈물 찔끔 흘리는 사이에 6개월이 지났다. 낯설게만 느껴졌던 거래처 사람들의 이름과 제품 스펙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 나오고, 사람들은 나를 믿기 시작했다. 일에서 보람을 느꼈고, 연애도 잘 하고 있었다. 게다가 가끔씩 외국인 고객과 간단한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도 늘었다. 취직을 했기에 명절에 친척들이 집에 오는 것도 불편하지 않았다. 친구들 모임에도 다시 나갔다. ‘외국계 회사‘라는 이름 뒤에 숨어 그럴듯하게 나를 포장했다. 모든 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바로 그때, 이상하게 불안하기 시작했다.

 

몇년 전에 갔던 싱가포르의 대표 축제 '칭게이 퍼레이드' 

'내 앞에 펼쳐질 60년 인생, 그 희미한 실루엣'

몇 달 후, 그 불안함의 정체가 드러났다. 이렇게 몇 년 더 일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집을 사고 은퇴하고 그리고 죽음. ‘사람 사는 거 다 그래!’라는 말속에 수백 번도 더 봤던 그 그림. 그 그림의 주인공이 나였다. 그렇게 정해진 내 미래에는 어느 것 하나 설레거나 기대되는 것이 없었다. 

 '인생이 이게 다야? 그러다 나이 먹고 그냥 죽겠네?' 

이 답답함을 어디 이야기할 때가 없어서 주말에는 서점으로 갔다. 혹시나 다른 삶과 이야기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불안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건 책에서 읽는 몇 문장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받은 위로는 월요일 아침 10시면 사라졌고, 그냥 그런 하루가 매일 이어졌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토요일, 무미건조한 얼굴로 서점에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해외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의 책을 들게 되었다. 책 안에는 신세계가 있었다. 한국 사람이 외국에서 일한다는 자체를 아예 모르고 살아왔는데 그 책 속에는 영국에서 당당하게 일하는 한국인이 있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그 자리에서 책을 다 읽어 버렸다. 혹시 비슷한 책이 또 있을까? 서점에는 런던의 어느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 뉴욕의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었다.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바로 이거였다! 난 해외로 가야 했다. 대학교 때 얼마나 해외에 나가고 싶어 했나? 그 바람이 다시 기억났다.

 

해외로 나갈 방법을 찾다?!

돈이 없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돈은 거기서 벌면 되니까! 그때부터 해외에서 일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가까운 중국과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칠레 등 사람이 갈 수 있는 모든 곳에서 한국인들은 살고 있었다. 지역과 언어를 넘어 내가 상상도 못 하던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서 놀랐고, 세상 돌아가는 것에 그렇게도 무지한 나 자신에 또 놀랐다. 오랜만에 설레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말에 해외 취업에 대한 에너지를 한껏 충전해도 월요일만 되면 내 마음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고, 일에 묻혀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 이중생활이 나를 서서히 말리고 있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게 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가서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가야겠다! 

 

어느 나라로 가야 할까?

가야 할 곳을 정하지 못해 갈팡질팡하다가 가까스로 몇 가지 기준을 세웠다.

 1) 영어권 국가

 2) 해외에 한 번도 나가지 못했던 내가 받을 문화적 충격을 덜기 위해 아시아권 국가

그렇게 생각해서 싱가포르를 선택했다. 뭐가 됐든 선택을 하니 불안감이 조금씩 사라졌다. 회사가 강하게 나를 잡을 때마다, 동료들이 정을 내세워 아쉬움을 표현할 때마다 괴로웠다. 살던 대로 살면 되는데 괜한 선택을 하며 오버하는 건 아닐까? 실제로 내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약해진 마음을 다잡기 위해 컴퓨터 바탕화면을 세계지도로 바꾸었다. 그렇게 해외취업을 생각한 지 1년 만에 한국을 떠나게 됐다.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것 VS 해외에서 살아보는 것

긴 고민 끝에 나는 20대의 회사생활보다 20대의 해외생활이 더 가치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물론 그 선택 때문에 자발적 백수생활을 하며 말도 안 되는 일을 겪고 팔자에도 없던 비자 걱정을 했다. 이력서만 이백 번을 내고, 모아놓은 돈이 거의 다 떨어져 불법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로 돌아가도 똑같은 결정을 내릴 것 같다. 취업을 하지 못해 한국에 돌아오게 되더라도 해외에서 살아본 적 없다는 평생의 아쉬움은 풀 수 있었을 테니까.

내 삶의 후회를 최소화하기 위해 선택한 해외취업. 한을 없앤다는 생각에 무모하게 도전해 버려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만큼 느낀 것도 할 이야기도 많아졌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앞으로 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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