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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나 나의 자존감 도둑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제 나는 피하지 않는 법을 배워보기로 했다.

나는 비록 달리기는 느리지만 도망가는 일엔 언제나 일등이었다. 게다가 겁도 많아서 무엇이든 의심도 자주 하는 편이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상처받는 게 겁나서 내가 마음 여는 일에 대해 자주 의심을 품었고, 불편한 상대가 있는 공동체 모임에는 온갖 핑곗거리를 대며 도망치곤 했다. 

 

나는 그게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굳이 불편한 사람이 있는 모임에 애써 참석할 필요는 없으니까. 꼭 사서 감정 노동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내 생각이 요즘 들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 전환점이 된 건, 지금 나와 같이 일하고 있는 한 아르바이트생에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였다. 그 아르바이트생은 이제 갓 20살 된 풋풋한 남자아이였다. 나보다 약 한 달 정도 먼저 더 일찍 들어와 일을 시작했던 그 남자는 이곳에서 흔히 말하는 텃세를 경험했다고 했다. 

 

처음에 딱 들어왔는데 기존에 있던 아르바이트생들끼리 너무 오래되고 서로 친해서 그 남자아이가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었다고 말했다. 거기다가 그 남자아이는 이제 막 사회생활도 처음이었고, 계속해서 상냥해야 하는 서비스직이 많이 낯설었다고 했다.  

 

그렇게 힘들게 적응하던 도 중, 오래 일한 한 아르바이트생과 그 남자아이가 크게 다투는 일이 생긴 것이다. 별거 아닌 일이었는데 서로 쌓인 게 많아 터진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말려 끝에는 서로 사과도 하고 끝났지만,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신을 욕하는 험담이 시작된 것이다. 

 

당연히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신입 편보다 더 오래 자신과 함께 일한 사람에 편에 서기 쉬웠다. 몰래 험담을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자신에 앞에서 들으라고 앞담화를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내가 들어오기 바로 몇 주 전, 이런 일이 이곳에 있었다는 게 뭔가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그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답답한 듯 물었다. “근데 왜 일을 그만두지 않았어요? 여기 아니어도 갈 때는 많았을 텐데.” 솔직히 나였으면 당장 그만뒀다. 힘들게 들어간 회사도 아니고, 고작 아르바이트 정도인데 왜 그 많은 험담을 다 들으면서 이곳에 다니고 있었던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남자도 수 없이 그만두는 것을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그만두지 않았다. 꿋꿋이 그 속에서도 계속 일을 다녔고, 오히려 지금은 자신을 욕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일을 그만둔 상태였다.  

 

그래서 내가 이 곳에 들어왔을 땐 그 친구를 욕하던 사람들은 거의 다 나간 뒤였고, 남자아이도 새로운 아르바이트생들과 함께 일하게 되니 전보다 더 편한 상태로 일을 다니면서 나에게 지난 이야기도 털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스무 살, 그 어린 나이에 했던 첫 사회생활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얼마나 오래 기억에 남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처음부터 뒷담화와 텃세라니. 분명 본인도 엄청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속에서 꿋꿋이 일을 했다. 순간 나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자신에 페이스를 지킨 이 남자아이가 대단해 보였다. 나였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행동이었다. 

 

남자아이는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솔직히 그만두고 싶은데 그만두면 자존심이 상하잖아요. 그건 저 사람들 때문에 내가 상처받았다는 거 증명하는 건데.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한테 신경 썼다는 게 전 자존심 상해요.”

 

누가 보면 스무 살에 귀여운 허세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나에게 큰 깨달음으로 와 닿았다. 나였다면 그 상황에서 자존심 상한다는 생각보다 그저 내가 상처받는 게 두렵고, 오로지 나에게 상처 주는 그 상황을 피하고 싶다는 마음만 들었을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건 내가 충분히 자존심 상해해야 할 문제였다. 자존심 상한다는 건 내가 여기서 도망칠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을 이기고 싶다는 문제로 바꾸어 주었다. 그리고 때로는 내가 꼭 그 사람과 싸워서 승리해야지만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자리를 도망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기는 싸움이 될 때가 있었다.  

 

한때 나는 상황을 아예 외면해 버리는 것만 상처받기 싫은 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나의 자존감 도둑을 위한 일이었고, 어느 정도 너의 말이 맞다고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친구를 보며 나 역시 조금 더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아르바이트생이 가르쳐 준 귀여운 허세처럼 속으로 ‘내가 너 때문에 나의 자존감이 깎인다면, 그거야 말로 나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라고 당당하게 받아치고 싶다. 왜냐하면 너는 나를 절대 불행하게 만들 수 없으니까. 그 정도도 허락할 수 없다. 나도 앞으로 이런 귀여운 허세 한번 부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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