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마케터라는 직무를 알게 된 이후에도, 마케터가 되기까지 여러 삽질들을 했다고 했다. 현업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감을 잡기 어려웠던 것, 회사들이 마케터를 많이 뽑지 않아서 좌절했던 것. 취업 준비하던 그 시기를 생각해보자면, 마케터로서 첫 발을 내딛는 것이 어렵기만 했다.
마케터가 되고 싶나요? 아니면 대기업 직장인이 되고 싶나요?
회사들이 마케터를 많이 뽑지 않아 좌절했던 경험에 대해 보자면,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마케터가 되고 싶은지, 대기업 직장인이 되고 싶은지 자신이 집중할 부분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년생 때 나는 방점을 명확히 찍지 못했다. 당연히 대기업에서 마케터를 하면 좋은데 왜 이런 걸 물어보나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나는 PLC (product life cycle)에 따라서, 인더스트리에 따라서 마케터가 하는 일도 다르고, 마케터 필요인력도 다르다는 것에 대해 전혀 몰랐기 때문에, 사람을 적게 뽑는 회사를 원망만 할 뿐이었다.
브랜드 마케터는 as is를 to be로 만들어가는 일을 하고, 브랜드가 가야 할 방향 (to be)으로 브랜드를 만들어가기 위해 브랜드 방향성 설정부터 시작해서, 신상품에 대한 고민, 프로모션 기획, 광고에 대한 기획까지 광범위한 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일들은 보편적으로 브랜드 마케터가 하게 되는 일이고, 실제로는 각 브랜드가 처한 상황, PLC, 인더스트리 특징에 따라서 마케터의 하는 일은 달라지게 된다.
먼저, PLC에 따라 각 브랜드의 to be가 달라지는데,
- 도입기에 해당하는 스타트업 등은 신규 유저 모집과 같은 몸집 키우기가 중요해서 마케터를 많이 채용하고 마케터가 주요 직무가 되어 비즈니스를 키우기도 하고, '신규 유저 모집' 등에 활동이 집중한다면,
- 성숙기에 해당하는 대기업 등은 마케팅 비용을 써도 이미 고객 확보가 되어 도입기보다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보니, 따라서 매출액 성장보다는 비용을 줄여 이익 증대가 중요해질 수 있다. 따라서 마케터가 비즈니스를 리드하기보다는 SNS 채널 운영처럼 업무 영역 줄어들 수도 있다.
팀원 면접을 보면서 대기업에서 온 마케터들이 오히려 SNS 운영과 같은 너무 작은 업무만을 맡아서 실제 스타트업에서 해야 할 광범위한 비즈니스 리드에 대한 면접 질문들을 거의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그리고 인더스트리 특징에 따라서도 마케터가 하는 일은 달라진다. 그냥 내가 다녔던 두 개의 회사를 비교해보아도, 같은 마케터라고 불리지만 하는 일의 성격이 아래 표처럼 다르다.
그래서 취업준비 당시에는 대기업 채용공고가 열리는 대로 마케터 자리에 지원했지만, 내가 가고 싶던 기업들은 이미 성숙기에 해당해서 마케터가 적게 필요한 상황이었고, 이미 경력직으로도 충분히 소화가 되고 있어서 신입 마케터 자리는 채용 0명이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나는 2개의 전혀 다른 성격의 시도를 했던 것 같다.
내가 했던 시도 첫 번째는, 일단 취업에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잡고 직무의 지원 스콥을 넓혔던 것이다. 일반 브랜드들의 경우 마케터로 지원하고, 유통 채널들에서는 채용 인원이 좀 더 많았고, MD가 더 힘이 있다는 현업자분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서 유통 채널들에는 마케터 대신 MD에 지원했다. 그때의 내가 정보 부족으로 힘들었겠구나 생각이 드는데, MD가 마케터보다 무조건 힘이 셀 수는 없고, 이 또한 브랜드가 처한 상황, 인더스트리에 따라 달랐을 텐데 너무 단편적인 정보만 듣고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취업준비를 몇 년이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스콥을 넓혀서 지원한 것은 '취업 완료'라는 측면에서는 좋은 전략이었으나, '마케터 되기'라는 측면에서는 리스크가 있었다. 1년간 취업준비를 끝내고서 결국 내게 주어진 자리는 한 유통사 MD 자리밖에 없었다. 취업준비를 할 당시에는 취업준비를 빨리 끝내고 싶다는 생각에 '이 정도면 괜찮겠지'라는 생각에 광범위하게 지원을 해놓고, 결국 내게 주어진 자리가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유통사 MD 자리가 되고 보니 좌절감을 느낄 뿐이었다. 내가 그동안 원해왔던 마케터 직무도 아니었고, 나중에 마케터로 이직을 하기에 유리한 자리도 아니었고, 바로 MD로 일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점포 경험을 6개월~1년을 해야 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결국 대기업/중견기업의 직장인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마케터는 되지 못했던 것이다.
대기업 직장인이 되려면 이렇게 직무 스콥을 넓혀서 가는 것이 옳았지만, 나는 결국에는 '마케터와 대기업 직장인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곧 죽어도 마케터'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고, 짧은 6개월 회사 생활 끝에 퇴사하게 되었다.
그다음 두 번째는, 회사는 작지만 마케터로서 일할 수 있는 스타트업 마케터로 이직했던 것이다.
퇴사한 이후에 다시 마케터로 도전할 때, 다시 취업준비를 해서 대기업 마케터로 갈지, 아니면 작은 곳이라도 들어가서 우선 배우고 갈지 크게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나는 다시 취업준비를 하는 대신 작은 곳이라도 들어가서 내 실력을 쌓는 것을 택했다. 그 당시 그래도 유통사는 중견기업에 속해 나름 연봉도 평균이었고, 네임밸류도 있었던 터라 스타트업으로 가려던 나의 선택을 모두들 말렸었다. 마케터라는 커리어 패스를 만들어감에 있어서는 옳을지 몰라도, 그 회사에 갔다가 회사가 망할 수도 있고, 커리어가 오히려 꼬일 수도 있다며 주변 사람들도 모두 말리던 선택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스타트업에서 좋은 사수를 만나서 퍼포먼스 마케터로서 커리어를 쌓고, 이 경력을 바탕으로 마케팅 사관학교라고 불리던 P&G에 이직하게 되면서, 이제 와서 보았을 때 좋은 선택이라고 불린다. 지금 와서 보니, 처음부터 원하는 회사로 바로 입사하지 못할 경우, 그 회사가 필요로 하는 능력을 만든 후에 입사하는 것을 선택했던 것 같다. 이직을 앞두고 '이게 옳은 선택일까?' 고민한다면 아래 글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https://brunch.co.kr/@236project/73
하지만 결국 이 선택의 결과가 좋게 나왔기에 하나의 전략이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이 선택 또한 첫 번째 방법처럼 리스크가 있었다고 이제 와서 생각해보는데, 이건 다음 글에서 '그럼에도 다들 첫 직장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에서 설명해야겠다.
이렇게 마케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이후, 내가 마케터로 일하고 있구나라고 생각이 들 때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원하는 회사에서 바로 커리어를 시작하면 좋으련만, 나는 내 마음의 괴리가 조금은 덜한 쪽으로 이동하면서 커리어를 만들어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를 알아갔던 것 같다. 나는 이런 상황을 싫어하는구나, 나는 이럴 때 성취감을 느끼는구나 하면서 더 내게 맞는 자리를 찾아왔다.
아래 마케터의 이직 이야기라는 글은 내가 마케터로 커리어를 시작한 이후에도 계속 이직을 해나가는 과정을 적어놓았다. 내게 맞는 곳이 있을 뿐 절대적으로 좋은 회사는 없다는 것 또한 깨달으면서, 이제는 남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내가 나다울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
https://brunch.co.kr/@236project/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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